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여몽의 형주 점령 ==== >윤달[* 219년의 윤달은 윤10월이다, 순서는 10월 → 윤10월 → 11월 → 12월.] , 손권은 관우를 정벌하려고 먼저 여몽을 파견해 공안을 습격하도록 하여 장군 사인을 붙잡았다. 여몽이 남군에 도착하자, 남군태수 미방은 성을 버리고 투항했다.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관우는 당양으로 돌아와 서쪽으로 맥성을 지켰다.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와해되어 흩어졌으며, 단지 10여 명의 기병만이 그를 따랐다. 손권은 우선 주연과 반장을 시켜 그가 지나갈 지름길을 끊어 놓았다. >---- >「오주전」 >여몽이 심양(尋陽)에 이르러 그의 정병들을 모두 배 안에 숨겨두고, 백성들에게 노를 젓게 하여, 상인의 복장을 해 입고 밤낮으로 가서,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이르러,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이 때문에 관우는 알지 못했다. 마침내 남군에 도착하자, 사인(士仁)과 미방(芳)이 모두 항복했다. >---- >「여몽전」 >손권은 은밀히 서쪽으로 군사를 파견하고, 육손과 여몽을 선봉 부대가 되도록 하여 공안과 남군을 신속하게 점령하도록 했다. 육손은 곧장 진군했다. 그는 의도태수를 겸임하고 무변장군(撫邊將軍)으로 임명되고 화정후(華亭侯)로 봉해졌다. 유비의 의도태수 번우(樊友)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각 성의 관리나 이민족의 우두머리들이 모두 투항했다. 육손은 금. 은. 동.의 관인을 청하여 방금 귀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해는 건안 24년(219) 11월이다. >---- >「육손전」 여몽은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 안에 숨겨놓고 흰 옷을 입고 노를 젓게 하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침입하여 관우가 마지막으로 혹시 몰라 남겨둔 강변의 둔후들을 모조리 붙잡아 묶으니[* 밑에서 우번의 말에서도 나오지만 내응자의 도움이 컸을 가능성이 크다. 호삼성은 미방과 사인이 배반하지 않았다면 관우가 알았을것이라는 설을 내세운다.] 관우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이렇게 관우가 경계를 위해 세워둔 둔들을 들키지 않고 정복한 여몽은 예전에 익양대치에서도 편지 두 장으로 장사, 계양 두 군을 항복시키고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등현지를 이용해 영릉을 얻은 것처럼 이번에는 기도위로 있다가 손권에게 쫓겨난 [[우번]]을 손권에게 억지로 부탁해서 끌고온 후 이용하기로 한다. 우번전에 의하면 우번은 의술에 능했으므로 여몽 본인의 지병 문제도 있긴 했을 것이다. 당시 수비 책임자는 남군의 [[미방#s-1]]과 공안의 [[사인(삼국지)|사인]][* 부사인이 아니다. 여몽전, 손권전, 계한보신찬에는 모두 사인(士仁. 성이 사, 이름이 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직 정사 관우전에서만 부사인(傅士仁)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정황상 오기의 가능성이 높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이었는데 당시 미방은 군량을 태워먹은 죄로 관우에게 심한 꾸짖음을 들었고 이에 두려움을 품고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으며 우번이 사인에게 언급한 것처럼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여몽은 우번에게 사인을 설득하게 한다. 이렇게 우번이 만나게 된 사인. 정사 관우전에 따르면 사인은 관우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군수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는 등의 일로 관우에게 질책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우번은 그를 직접 설득하려고 하나 의외로 사인은 공안을 지키면서 우번을 만나주지도 않는다. 우번은 그것을 보고 사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편지 왈, '우리가 왔는데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으니 내응이 있었다는 거쯤은 알 수 있지 않아? 어차피 여몽 장군이 남군으로 육로를 끊으면 살 길이 막히는데 여기서 버텨봐야 니 가족만 망하고 싸워도 살 길이 없으니 항복하라고' 사인은 이 편지를 읽고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꼈는지 눈물을 흘리며 항복한다. 우번은 사인의 항복을 확인하자마자 이는 휼병[* 譎兵, 기만술에 의한 군사행동]이니 응당 사인을 남군으로 데리고 가야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해야 한다고 하니 여몽은 우번의 말 대로 사인을 데리고 미방이 있는 남군으로 간다. 애시당초 상황상 협박편지로 항복한 사인 같은 사람에 비해서 서주부터 유비를 따르고 동생은 유비와 결혼도 했고 촉에 형 [[미축]]이 있는 미방은 남군태수로서 임명되어 관우와 같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두 사람 간의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좋지 않았고(불화했고) 이에 미방이 두 마음을 품고는 모반하여 손권을 맞이했다고 미축전에 전한다. 그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결정적으로 군수물자를 태워먹은 일 때문에 질책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을 품어서 '''대놓고 이전부터 손권과 내통하고 있었기에'''[* 실제로 정사의 주석인 오록 기록에는 미방이 남군성의 군사기물을 태워먹은 실수로 인해 손권과 내통했다고 기록했다.] 사인을 보자 별 미련도 없이 시원스레 성을 넘겨주고 만다. 그것도 '''쇠고기와 술을 준비해서 대접까지 하면서.''' 정사 여몽전 주석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배반의 주체를 명백히 미방으로 한정짓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미방의 항복은 미방 본인의 독단이었기에 남군성 사람들로는 "이게 [[뭥미]]?"의 상황. 우번 말대로 내응이 있어 척후도 없고 봉화도 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오군이 나타나고 그 내응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 당연하다. 20여 년을 넘게 유비를 섬기고 군주의 인척이기까지 하고 그의 형은 유비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런 사람이 내통한다는 걸 예측하는 사람이 있었을 리가.]이었으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다. 결국 몇몇 사람이 복병을 만들어 성급하게 연회를 여는 여몽을 공격하려 했지만 우번이 이를 예측하고 한창 성 밖에서 축하연을 벌이고 있던 여몽에게 경고를 하고 여몽 또한 우번의 말을 들어 관악을 장악한 탓에 성공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